
이곳이 바로 아케나인…
좋은 바람이 부는 곳이구나.
가끔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쉬는 것도 좋겠네.
반가운 벗인 너도 있고 말이야.
후후.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 위해
중요한 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 생각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게끔…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게 수련하고 있지만…
도통 마음처럼 쉬이 되지 않네.
어찌보면 항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무인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자질일지도 모르겠어.

설마 이곳에서 제자들과 만날 줄은 몰랐어.
아키와 오토하…
두 아이 다 굉장히 훌륭한 제자였지.
어두운 걱정의 그림자도 느껴지긴 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홍란과 알게된 지도 꽤 오래 지났지만…
요즘처럼 그 아이가 철이 들어 보이는 건 처음이야.
여태까지 변하지 않았던 홍란이 변한 건,
필시 좋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 만남의 상대는 바로 너겠지, 구원자?

한때는 오토하를 많이 걱정했었지만…
지금은 건강해서 정말로 다행이야.
그 아이의 재능을 생각하면
오토하가 검의 길을 포기한 게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갈 다른 길을
스스로 찾아낸 게 정말이지 대견스러워.
부디 앞으로도 잘 지내면 좋겠는데…

네게 선물로 주려고 빚은 술을 들고
거리를 걷다 보니 셰리라는 정령이 말을 걸더군.
어찌나 내 술을 먹음직스러워 하던지…
나도 모르게 따로 준비했던 술을 좀 선물하고 말았네.
그렇게 연락처를 교환하게 되었는데…
하하. 연이란 정말 어떻게 생길지 모르겠군.
이것 또한 기연이겠지?

으음… 혹시 착각할까봐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내가 술을 빚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술에 취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야.
술이 빚는 건 다른 생산활동과 똑같거든.
성심성의껏 공을 들여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는 것.
어떤 의미로는,
제자를 키우는 것과 조금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모두 같은 기원을 지닌 힘을 사용한다 해도,
각 나라별로 수련하는 방식은 썩 다른 거 같더군.
나는 가온을 좋아해서
어지간해선 가온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긴 하다만…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의 강자들과도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마침 그들을 만나볼 좋은 장소도 있으니 말이야.

사실 속세에 이렇게 나오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매번 나올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게
유행하고 있는게 항상 신기해.
그래도 이제는 네 영지를 이렇게
왕래할 일이 생겼으니…
조금은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있겠구나.

지호와도 알고 지낸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그 아이는 참 신기해.
지호가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것도
그 아이가 겪어온 일을 생각하면 이해는 가긴 하지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서 어떤 결과를 얻었건 간에,
그 아이가 힘을 지닌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그리고 힘을 지녔다면,
그만큼 의를 행하는 것도 당연하고 말이야.
지호는 본질적으로 의를 추구하는 아이니,
잘해줄 거라 믿고 있어.

비록 내가 가온제일검이라고 불릴 때가 있긴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 가온에서 제일 강하냐 하면, 그건 아니야.
주작이 검을 쓰지 않으니
검을 쓰는 내가 '가온제일검'이라는 풍문이 돌 뿐.
실제로 싸우면 내가 이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

가온을 떠돌며 다양한 온천을 다녀본 만큼
나도 온천에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
듣자 하니 페이렌 북부에 있는
화산 온천이 그렇게 괜찮다더군.
너는 가본 적이 있나, 구원자?
괜찮다면 내게 관련 정보를 좀 알려주면 좋겠네.

직접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구원자, 너는 참 신기하구나.
보통 내게 있어서 남이란
지켜야하는 존재거나 맞서 싸우는 존재…
혹은 사방신처럼 같은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동등한 존재의 세 분류인데.
너는… 그 중 어느것에도 속하지 않음과 동시에,
모든 것에 속하기도 하는 것 같아.
…참 기묘해.

속세를 떠나 은거하다 보면,
많은 것들을 혼자 해결하게 되지.
특히나 요즘은 제자를 들이는 일도 없다 보니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이 썩 익숙하지 않아.
그로 인해 덤벙대는 일이 줄어든 건 좋지만…
독선적인 부분도 생긴 걸 보니
역시 모든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야. 안 그래?

평소에는 술식으로 내가 입은 상처를 숨기고 있는 만큼
사실 내 상처에 대해 아는 이들은 정말 적어.
어쨌거나 가온을 지키는 사방신 중 하나이니,
내게 결함이 있다는 게 알려진다는 건 즉…
국가 수준의 보안 정보가 새어나가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사실은 네게도 보여주면 안되었는데…
어째서일까.
네게는 진실을 숨기는 게 정말 어렵네.

현무는 음과 양의 기운을 다루는 데에 능하고,
주작은 화려할 정도로 강력한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지.
홍란도 전투 능력이라면 밀리지 않지만,
아무래도 아직 기교 면에서는 조금 더 성장의 여지가 있어.
하지만… 역시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더군.
…후후. 어때, 구원자.
괜찮다면 네가 본 나를 알려주지 않겠어?
내가 조금 더 나은 정령이 될 수 있게 말이야.

가온이 건국된 이래로
현무는 단 한 번도 안 바쁜 적이 없었지만…
최근 현무를 보면 그래도 좀 안쓰러울 정도더군.
도와줄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후후. 이게 다 네 덕분에
내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러려나.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구원자.
우리는 서로 등을 기댈 수 있는 사이니까.
그렇지?

너무 오랫동안 살아서 그런지, 한때 내게 세월이란
제자들의 수학을 가늠하게 해주는 기준에 불과했는데…
너를 알게된 이후로는
어쩐지 시간의 흐름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되더군.
그 어떤 날도 같은 바람이 부는 날은 없지만…
그 사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구나.

가끔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먹을 갈고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곤 하지.
시력을 봉인한 만큼, 제대로 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집중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정신 통일은 되지만
딱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은 안 들어.
…역시 아키에게 추천받은 대로
꽃꽂이를 해보는 게 좋을까?

눈이 안 보이는 것은
확실히 불편하지만, 내게는 필요한 일이었어.
그렇기에 시력을 봉인한 것은
전혀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지만…
때로는 네 얼굴을 편안하게 감상하며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기 힘드네.
그러니 가끔은 네 얼굴을 만져봐도 될까, 구원자?
이 두 손으로 너를 구석구석, 천천히 훑어서…
네 형태를 보다 가까이서, 선명하게 느끼고 싶어.
부디 허락해 주겠어?

좋은 바람이군.
어디, 제자들은 뭘 하고 있으려나…
오늘은 어디에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