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도 말했지만…
너와 나누고 싶은 말은 없어.
너 말고 다른 정령들과 친해질 생각도 없고.
…그러니까 날 내버려 둬.
내가 더 이상 마음 쓰게 하지 마.

…따사로운 햇빛. 기분 좋은 바람. 향긋한 꽃내음.
세상은… 정말로 많이 변했구나.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씨앗을 가지고 싶어.
방주 안에서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개조해볼까 하거든.
물론 그래도 상관 없겠지?

…가끔 햇빛이 너무 눈부시게 느껴져.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심해 속에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지…
바깥에서 이렇게 햇빛을 쬐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네.

여신 이브라니…
어째서 그런 종교가 생겼는지는 납득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믿는 여신이 아니야.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봐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사랑에 가득찬, 자애로운 어머니 정령 이브라니…
완전히 잘못 짚고 있어.
나는… 나만큼 이기적인 정령을 모르는데…

1호 방주에 연구에 쓸 수 있는
비품이 이렇게 많이 있을 줄은 몰랐어.
덕분에 내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대체 누굴 위해 준비되어있던 걸까.

…유리아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양 손에 빗과 머리끈을 들고 날 찾아왔어.
머리카락을 다른 스타일으로 하는 게
작은 유행인가봐.
…딱히 내 머리카락을 만져도 상관 없긴 하지만…
그 아이들은 저주가 무섭지 않은 건가.
아니면… 이미 저주를 받아서 그러는 걸까.
…그러고보니 조금 눈빛이 무섭긴 했어.

방주에서 쉬고 있으면
자주 메피스토펠레스와 마주치는 편이야.
딱히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지만…
그 아이는 계속해서 내 주변을 맴돌던데…
…내 저주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신기해서 그런 걸까.

사실 몸단장은 서툰 편이야.
먼 옛날에도… 내가 몸단장을 잘 못해서
항상 주변인들이 도와주곤 했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나 혼자 해보려고 했더니…
'이브는 그런 거 안해도 돼!!!'…
'우리의 즐거움을 빼앗지 말아줘!!!' 라고 울더군.
…….
대체 뭐였을까.

여왕 유리아…
설마 '그 아이'가 이런 모습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걸.
지금은 온순해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 아이는 이 세계의 파멸을 불러올 존재가 되고 말테니까.

너는… 내가 곁에 다가가면
아주 심하게 긴장하더군.
하지만 그 긴장의 이유가
일반적인 케이스들과는 조금 달라.
너는 내가 너에게 위해를 가할까봐 긴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네가 내게 위해를 가할까봐 긴장하더군.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나를 상처입힐 수 없으니까.
내 몸과 마음은 이미 충분히 만신창이야.
네가 실수로 나를 상처입힌다 해도 그리 아프지 않아.

방주의 개인실에 꽃을 키우기 시작했어.
구속에서 풀려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힘의 제어가 완벽하진 않지만…
가능한… 계속 아름다운 모습으로 있게 해주고 싶네.

무저갱에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로 보냈어.
그래서 가끔 꿈과 현실의 분간이 안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예를 들면 지금도…
네가 나의 곁에 존재하는 건,
내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해.
아니면…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겪은 수많은 고통이
실은 꿈이고, 너와 함께하는 지금이 현실일까.
…….
나는 어느 쪽이 현실이었으면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너도 내가 벌레 같은 걸 무서워할 거라 생각해?
나는 사실 벌레나 곤충의 외형에
혐오감을 느끼지 않아.
오히려 따지자면… 흥미를 가지고 있어.
하지만 예전부터 어째서인지 내 근처에
벌레가 다가오면, 다들 기겁하며 쫓아내더군.
…이해할 수 없어.

만일… 나를 깨운 것이 네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내가 너의 편이 아니었다면.
나는 너를 제일 먼저 죽이고 싶을 거야.
네가 계속해서 나의 약한 곳을 파고드니까,
네가 제일 큰 위협처럼 느껴져.
…아주 곤란해.

공방의 연구원들은 가끔 나를 보러 오곤 했어.
그저 바라만 보다가,
멋대로 '치유된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는데…
네가 나를 자주 만나러 오는 것도
그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야?
…저주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치유 효과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너의 손길이 내 몸에 닿는 감각이 좋아.
너의 온기가, 네 손의 감촉이 내게 닿는 순간…
감각이 예민해지는 느낌이 들거든.
그리고 느껴.
나는 여기에 살아있구나, 하고.
그러니까…
내 어리광을 받아줄 생각이라면 전부 받아줘.
나를 사랑하기로 정했다면…
끝까지 사랑해.
…부탁이야.

너와 함께하는 이 시간들이…
내 영혼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으면 해.
네가 죽더라도, 너와 함께한 기억들이
나의 영혼의 일부가 되어서…
내가 너와 함께 영원을 살아갈 수 있도록.
너의 모든 시간을, 내게 새기게 해줘.

사랑이라는 감정…
내게는 여전히 어렵게 느껴져.
정의에 따르면 사랑은 아름답고 행복한 무언가지만
이 세상엔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너무 많지.
하지만 그렇게 고통 받으면서도,
결국 모두 사랑을 갈구하게 되어버리고 말아.
사람이 사라지고, 정령들만 남은 이 세상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언젠가 내게도… 사랑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내 존재가 너에게 해악을 끼칠 걸 알면서도,
네 곁을 맴도는 걸 멈출 수가 없어.
나는 더 이상 너를 피하지 않아.
네가 그러길 바랬으니까.
내게 깃든 저주는 네가 죽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너와 함께할 수 있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볼 예정이니까…
…그때까지 잘 버텨 봐.
알겠지?

실험하기 좋은 날이군.
가까이 다가오지 마.
햇볕… 기분 좋아…